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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을 이끈 자유의 여신, Eugène Delacroix

민중을 이끈 자유의 여신, Eugène Delacroix

사진: Eugène Delacroix, 「La Liberté guidant le peuple」(1830), Musée du Louvre

화약 연기가 자욱한 파리의 바리케이드 위로 한 여인이 삼색기를 높이 들고 성큼 올라섭니다. 그 뒤로 실크해트를 쓴 남자와 칼을 든 노동자, 양손에 권총을 쥔 소년이 따라오고, 발밑에는 쓰러진 사람들이 누워 있죠. 교과서에서, 지폐에서, 심지어 밴드 Coldplay 의 앨범 표지에서도 한 번쯤 봤을 이 그림의 제목은 「La Liberté guidant le peuple」(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입니다.

혁명 하면 떠오르는 이 유명한 그림을 그린 사람은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 Eugène Delacroix 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Delacroix 가 어떤 화가였는지 재밌는 일화와 함께 소개하고, 자유의 여신을 비롯한 대표작 다섯 점에 담긴 이야기도 살펴보겠습니다.

1. Eugène Delacroix 는 어떤 화가일까?

Eugène Delacroix 는 1798년 4월 26일 파리 바로 옆 Charenton-Saint-Maurice 에서 태어나 1863년 8월 13일 파리에서 세상을 떠난 화가입니다. Victor Hugo, Alexandre Dumas, 작곡가 Hector Berlioz 와 같은 시대를 살았고, 이들처럼 옛 규칙보다 자기만의 방식을 따르려 한 새 세대 예술가, 곧 낭만주의(le romantisme)를 대표하는 화가로 꼽히죠.

Delacroix 가 가장 아낀 건 색이었습니다. 반듯한 윤곽선과 차분한 구도를 중시하던 시절에 강렬한 색과 소용돌이치는 구도로 그림을 그려서, 비평가들에게 자주 욕을 먹었어요. 같은 시대 신고전주의 화가 Ingres 가 선을 대표했다면 Delacroix 는 색을 대표한다고 해서, 두 사람은 평생 맞수로 비교됐습니다. 그래도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는 Ingres, Horace Vernet 와 함께 따로 전시실을 받아 30점이 넘는 작품을 걸었고, 그 시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화가로 인정받았죠.

검은 정장에 나비넥타이를 매고 손을 가슴에 얹은 채 옆을 바라보는 예순 살 무렵 Eugène Delacroix 의 흑백 사진

사진: Nadar, 1858

2. Charenton 에서 rue de Furstemberg 까지

Paris, Marseille, Bordeaux, Londres, Tanger, Meknès, Alger 에 번호를 달아 Delacroix 가 살고 여행한 곳을 표시한 프랑스와 지중해 지도

지도 데이터: Natural Earth. 나라 경계는 지금 기준입니다

Delacroix 가 태어날 무렵 아버지 Charles Delacroix 는 외무장관을 거쳐 네덜란드 대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 뒤 Marseille 와 Bordeaux 의 지사(préfet)를 지냈는데, 1805년 Bordeaux 에서 세상을 떠났죠. 어머니 Victoire 는 왕 Louis XV 의 가구를 만들던 이름난 가구 장인 Jean-François Oeben 의 딸이었어요. 아버지의 외무장관 자리를 이어받은 사람이 정치가 Talleyrand 였는데, 그래서인지 Talleyrand 가 Delacroix 의 친아버지라는 소문이 오래 돌았습니다. 다만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은 없어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어머니와 파리로 올라온 Delacroix 는 지금의 Louis-le-Grand 고등학교인 lycée Impérial 에 다녔습니다. 몸은 약했지만 공부와 그림, 책 읽기를 좋아하는 소년이었죠. 1814년에는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 화가였던 외삼촌의 도움으로 화가 Pierre-Narcisse Guérin 의 화실에 들어갔습니다. Guérin 은 이 제자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같은 화실 선배 Théodore Géricault 가 Delacroix 를 아껴 줬어요.

1822년 스물네 살에 살롱(Salon)에 처음 낸 큰 그림으로 단번에 이름을 알렸고, 1824년과 1827년에도 살롱에 걸린 큰 그림마다 찬사와 비난을 함께 받았습니다. 살롱은 나라가 여는 공식 미술 전시회로, 여기서 눈에 띄어야 화가로 인정받던 시절이었죠. 그리고 1830년 7월 파리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그해 가을 「La Liberté guidant le peuple」을 그렸습니다.

1832년 1월 Delacroix 는 왕 Louis-Philippe 가 모로코 술탄에게 보낸 사절 Mornay 백작을 따라 모로코로 떠났습니다. 1825년 여름 몇 달 동안 영국에 다녀온 것 말고는 프랑스를 떠나 본 적이 없던 Delacroix 에게 Tanger 에서 Meknès 까지 이어진 여행은 눈이 부신 경험이었어요. 풍경과 소리, 색, 사람들의 옷차림에 반해 수첩에 스케치와 수채화를 가득 채웠고, 돌아와서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모로코를 떠올리며 그린 그림이 60점이 넘습니다.

흰 옷을 입은 술탄이 회색 말을 타고 양산 아래 성문 앞으로 나오고, 신하와 군인들이 둘러싼 Eugène Delacroix 의 그림

그림: Eugène Delacroix, 「Moulay Abd-er-Rahman, sultan du Maroc, sortant de son palais de Meknès」(1845), Toulouse Musée des Augustins 소장

1830년대부터는 나라와 파리시가 맡긴 커다란 벽화와 천장화를 많이 그렸습니다. 하원 의사당인 Palais Bourbon 의 「왕의 방」과 도서관, 상원인 Palais du Luxembourg 의 도서관, 루브르 박물관 Galerie d'Apollon 의 천장이 모두 Delacroix 의 손을 거쳤죠. 파리 시청에 그린 그림은 1871년 화재로 사라졌어요. 1849년에는 Saint-Sulpice 성당의 한 예배당(chapelle des Saints-Anges)을 꾸며 달라는 주문을 받아 1861년까지 매달렸습니다.

거대한 나무들 아래에서 Jacob 이 날개 달린 천사와 맞붙어 씨름하는 Saint-Sulpice 성당의 벽화

사진: Jean-Pierre Dalbéra, Saint-Sulpice 성당의 「La Lutte de Jacob avec l'Ange」(2019), CC BY 2.0

1857년 12월 28일, 지친 Delacroix 는 매일 성당까지 먼 길을 오가기 힘들어 Saint-Sulpice 근처의 rue de Furstemberg 로 이사했습니다. 남이 볼 수 없는 작은 정원을 혼자 쓸 수 있고 그 정원에 화실까지 지을 수 있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고 해요. 1835년부터 곁을 지킨 가정부 Jenny Le Guillou 와 단둘이 살면서 가끔 파리 남쪽 Champrosay 의 시골집에 머물렀고, 1863년 8월 13일 이른 아침 이 집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평생 써 온 일기(Journal)는 1893년에 처음 책으로 나왔는데, 그림과 색에 대한 생각이 빼곡해서 지금도 많은 화가가 읽는 책이죠.

3. Delacroix 에 얽힌 일화

3.1. 선배의 뗏목 그림에 모델로 선 Delacroix

1816년 프랑스 군함 Méduse 호가 아프리카 앞바다에서 좌초했을 때, 급히 엮은 뗏목에 오른 150명 가까운 사람 가운데 13일 뒤 구조된 사람은 15명뿐이었습니다. Géricault 는 이 사건을 가로 7m 가 넘는 그림으로 그렸어요. 1819년 살롱에 걸린 「Le Radeau de la Méduse」(메두사호의 뗏목)죠. 화실 후배였던 Delacroix 는 이 그림에 직접 모델로 섰습니다. 뗏목 위에서 죽어 가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Delacroix 인 셈입니다.

거친 바다 위 뗏목에 죽은 사람과 살아남은 사람들이 뒤엉켜 있고, 맨 위의 사람이 멀리 수평선을 향해 천을 흔드는 Théodore Géricault 의 그림

그림: Théodore Géricault, 「Le Radeau de la Méduse」(1818~1819), Musée du Louvre 소장

아래에 누운 시체들 위로 사람들이 피라미드처럼 쌓여 올라가고, 맨 꼭대기의 사람이 천을 흔드는 구도를 눈여겨보세요. 루브르 박물관의 큐레이터 Côme Fabre 는 Delacroix 가 11년 뒤 「La Liberté guidant le peuple」을 구상할 때 이 그림의 함께 솟구치는 힘을 떠올렸다고 봅니다. 두 그림은 지금 루브르 박물관의 같은 전시실에 함께 걸려 있어요.

3.2. 둘로 잘린 Chopin 과 George Sand

Delacroix 는 작곡가 Frédéric Chopin, 소설가 George Sand 와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두 사람이 연인이던 1838년, Delacroix 는 피아노를 치는 Chopin 과 그 곁에서 음악을 듣는 Sand 를 한 화면에 담은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죠. 나중에 Sand 의 시골집이 있던 Nohant 에 머물며 두 사람과 여름을 보내기도 했을 만큼 사이가 좋았어요.

그런데 이 그림은 끝내 완성되지 못한 채 Delacroix 의 화실에 남아 있다가, 그가 세상을 떠난 뒤인 1863년부터 1874년 사이에 누군가의 손에 둘로 잘렸습니다. 지금 Chopin 쪽은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Sand 쪽은 덴마크 코펜하겐의 Ordrupgaard 미술관에 있어요. 두 점으로 나눠 팔면 돈을 더 받을 수 있어서 잘랐다는 이야기가 돌지만, Ordrupgaard 미술관은 언제, 왜, 누가 잘랐는지 확실하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왼쪽은 어두운 옷을 입고 고개를 숙인 George Sand, 오른쪽은 검은 옷을 입고 생각에 잠긴 Chopin 의 초상. 원래 한 그림이던 두 조각을 나란히 놓았다

그림: Eugène Delacroix, 원래 한 그림이던 두 초상(1838). 왼쪽 「George Sand」, Ordrupgaard 미술관 소장, 오른쪽 「Frédéric Chopin」, Musée du Louvre 소장

3.3. 일곱 번 만에 들어간 아카데미

나라가 그림을 사 주고 궁전 천장을 맡길 만큼 이름난 화가였지만, 정작 미술계의 최고 기관인 아카데미 데 보자르(Académie des beaux-arts)는 Delacroix 를 좀처럼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회원 자리가 빌 때마다 도전했다가 번번이 떨어졌고, 1857년 1월 일곱 번째 도전에서야 회원이 됐죠. 쉰여덟 살 때였어요. 그해 말 이사한 rue de Furstemberg 의 집은 아카데미가 있는 Institut de France 에서도 걸어서 몇 분 거리였습니다.

3.4. 제자 없이 남긴 후배들

Delacroix 는 따로 제자를 두지 않았습니다. 화실 일과 벽화 작업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랐거든요. 그런데 그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 1864년 2월, 화실에 남은 작품을 파는 경매가 열리자 젊은 화가들은 그동안 몰랐던 Delacroix 의 스케치와 습작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같은 해 화가 Henri Fantin-Latour 는 Delacroix 의 초상 앞에 Édouard Manet, James Whistler, 시인 Charles Baudelaire 와 자신을 세운 단체 초상 「Hommage à Delacroix」(Delacroix 에게 바치는 경의)를 그렸죠.

벽에 걸린 Delacroix 의 초상화 앞에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 열 명이 모여 서 있는 Henri Fantin-Latour 의 그림

그림: Henri Fantin-Latour, 「Hommage à Delacroix」(1864), Musée d'Orsay 소장

1865년 초에는 스물네 살의 Claude Monet 가 친구 Bazille 와 함께 바로 그 rue de Furstemberg 에 화실을 얻었습니다. 창밖으로 Delacroix 가 쓰던 화실이 보였다고 해요. Monet 와 Edgar Degas, Paul Cézanne 은 저마다 Delacroix 를 스승처럼 떠받들었고, 제자 한 명 없던 화가는 이렇게 다음 세대 화가들의 스승이 됐습니다.

4. Delacroix 의 대표작

Delacroix 의 대표작을 그린 순서대로 살펴보겠습니다. 다섯 점 모두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같은 전시실에 걸려 있어요.

4.1. La Barque de Dante (1822)

Dante 의 「신곡」 지옥 편에서 시인 Virgile 의 안내를 받은 Dante 가 작은 배를 타고 지옥의 강을 건너는 장면입니다. 붉은 두건을 쓴 Dante 는 겁에 질려 몸을 젖히고, 월계관을 쓴 Virgile 은 그 손을 잡아 주죠. 그 사이 배에 매달려 기어오르려는 저주받은 영혼들이 몸을 비틀고 있어요. 원래 제목은 「Dante et Virgile aux Enfers」(지옥의 Dante 와 Virgile)이고, barque 는 작은 배라는 뜻입니다.

불타는 지옥의 도시를 배경으로 작은 배에 탄 Dante 와 Virgile, 그 배에 매달린 벌거벗은 영혼들을 그린 Eugène Delacroix 의 그림

그림: Eugène Delacroix, 「Dante et Virgile aux Enfers」(1822), Musée du Louvre 소장

스물네 살 Delacroix 가 1822년 살롱에 처음 낸 큰 그림인데, 나라가 그해 7월 2,000프랑에 바로 사들였습니다. 이 그림을 가장 크게 칭찬한 사람은 당시 신문 「Le Constitutionnel」에 살롱 비평을 쓰던 젊은 기자 Adolphe Thiers 였어요. Thiers 는 이 그림만큼 장차 대화가가 될 사람을 잘 보여 주는 그림이 없다고 썼는데, 훗날 총리와 대통령까지 지낸 Thiers 는 1834년 Delacroix 가 Palais Bourbon 의 벽화를 맡게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4.2. Scènes des massacres de Scio (1824)

1822년 4월, 그리스가 오스만 제국에 맞서 독립 전쟁을 벌이던 중에 오스만 군대가 에게해의 섬 Chios(프랑스어 옛 이름 Scio)에 들이닥쳐 주민 수만 명을 죽이거나 노예로 끌고 갔습니다. 유럽 전체가 이 소식에 분노했고, 2년 뒤 Delacroix 는 이 사건을 높이 4m 가 넘는 그림으로 그렸어요. 제목을 끝까지 쓰면 「Scènes des massacres de Scio. Familles grecques attendant la mort ou l'esclavage」, 곧 '죽음이나 노예가 될 날을 기다리는 그리스 가족들'입니다. massacre 는 학살이에요.

앞쪽에 지치고 다친 그리스 사람들이 맥없이 모여 있고, 오른쪽에서 말을 탄 오스만 군인이 여인을 끌고 가는 Eugène Delacroix 의 그림

그림: Eugène Delacroix, 「Scènes des massacres de Scio」(1824), Musée du Louvre 소장

이 그림에는 적을 무찌르는 영웅이 없습니다. 앞쪽에는 죽어 가는 엄마의 가슴을 찾는 아기, 넋이 나간 노인, 서로 기댄 연인처럼 힘없이 늘어진 사람들만 가득하죠. 스승 세대의 화가 Antoine-Jean Gros 는 이 그림을 보고 「그림의 학살(le massacre de la peinture)」이라고 했다고 전해지는데, 이 말은 소설가 Alexandre Dumas 가 남긴 이야기라서 그대로 믿기는 어려워요. 그래도 나라는 6,000프랑에 이 그림을 사들였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의 Côme Fabre 는 이 그림의 색을 '거칠고, 대비가 강하고, 차갑다'고 봅니다. 전쟁의 참혹함을 숨기지 않으려고 일부러 그렇게 칠했다는 거예요. 3년 뒤에 그린 다음 그림과 나란히 보면 그 차이가 확 드러납니다.

4.3. La Mort de Sardanapale (1827)

영국 시인 Byron 의 희곡에서 가져온 장면입니다. 반란군에게 포위된 고대 아시리아의 왕 Sardanapale 는 장작더미 위 침대에 누워, 자기를 즐겁게 해 준 것은 하나도 남기지 말라며 여인들과 말, 개까지 모두 죽이라고 명령하죠. 왕은 턱을 괸 채 그 아수라장을 무심하게 내려다봅니다. mort 는 죽음이에요.

붉은 천이 깔린 커다란 침대 위에 왕이 비스듬히 누워 있고, 그 아래에서 신하들이 여인들과 말을 죽이는 장면이 소용돌이치듯 펼쳐진 Eugène Delacroix 의 그림

그림: Eugène Delacroix, 「La Mort de Sardanapale」(1827), Musée du Louvre 소장

1827년 살롱(이듬해 봄까지 열렸습니다)에 걸린 이 그림은 Delacroix 최악의 실패작이 됐습니다. 도덕도 그림의 규칙도 일부러 다 어겼다는 비난이 쏟아졌고, 아무도 사지 않아서 그림은 18년 동안 화실에 머물렀어요. 1846년에야 한 수집가에게 6,000프랑에 팔렸는데, 이 그림이 1921년 루브르 박물관에 들어올 때 값은 70만 프랑이었습니다.

2023년 이 그림을 복원한 루브르 박물관의 Sébastien Allard 와 Côme Fabre 는, Delacroix 가 원근법을 대놓고 무시하고 이 이야기를 핑계 삼아 자기가 좋아하는 것, 곧 사람의 몸과 살결, 천, 금은 장신구, 동물을 마음껏 그렸다고 해석합니다. 차갑던 「Scio」와 달리 선은 관능적이고 색은 따뜻하죠. Delacroix 가 훗날 일기에 쓴 이 문장을 서른 살에 이미 실천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La couleur n'est rien si elle n'est pas convenable au sujet

색은 주제에 어울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et si elle n'augmente pas l'effet du tableau par l'imagination.

상상력으로 그림의 효과를 키워 주지 않아도 마찬가지다.

— Eugène Delacroix, 일기(Journal)

4.4. La Liberté guidant le peuple (1830)

1830년 7월 27일부터 29일까지 사흘 동안, 언론의 자유를 막는 법에 화가 난 파리 시민들이 거리에 바리케이드를 쌓고 일어섰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이 「영광의 사흘(les Trois Glorieuses)」이라고 부르는 7월 혁명이죠. 왕 Charles X 가 쫓겨나고 Louis-Philippe 가 새 왕이 되면서, 15년 동안 금지됐던 삼색기도 돌아왔어요.

쓰러진 사람들 위로 삼색기를 든 여인이 바리케이드를 넘고, 실크해트를 쓴 남자와 권총을 든 소년이 그 뒤를 따르는 Eugène Delacroix 의 그림

그림: Eugène Delacroix, 「La Liberté guidant le peuple」(1830), Musée du Louvre 소장

혁명을 직접 지켜본 Delacroix 는 그해 9월부터 12월까지 quai Voltaire 의 화실에서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무렵 형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적었죠.

J'ai entrepris un sujet moderne, une barricade,

요즘 일어난 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바리케이드예요.

et si je n'ai pas vaincu pour la patrie, au moins peindrais-je pour elle.

조국을 위해 싸워 이기지는 못했어도, 조국을 위해 그림은 그릴 수 있겠지요.

— Eugène Delacroix, 형 Charles-Henry 에게 보낸 편지(1830년 10월)

제목은 1831년 살롱 목록에 「Le 28 juillet. La Liberté guidant le peuple」(7월 28일. 민중을 이끄는 자유)로 올랐습니다. guider 는 이끌다, peuple 는 민중이라는 뜻이에요. 높이 2.6m, 너비 3.25m 의 그림 속 여인은 실제 인물이 아니라 '자유'라는 생각을 사람 모습으로 그린 알레고리(allégorie)입니다. 그리스 조각 같은 옆얼굴에 자유를 상징하는 붉은 프리지아 모자(bonnet phrygien)를 쓰고, 총검을 든 채 맨발로 앞장서죠. 뒤쪽 연기 사이로는 Notre-Dame 대성당의 두 탑이 보여요.

여인을 둘러싼 사람들은 옷차림을 보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 교육 자료에 따르면 베레모를 쓰고 칼을 든 사람은 공장 노동자, 실크해트를 쓰고 사냥총을 든 사람은 장인이나 작업반장, 쓰러져 여인을 올려다보는 사람은 시골에서 올라온 건설 노동자예요. 실크해트의 남자가 Delacroix 자신이라는 이야기도 흔히 돌지만, 루브르 자료에는 그런 이야기가 없습니다. 양손에 권총을 든 소년은 훗날 Victor Hugo 가 1862년 「Les Misérables」(레 미제라블)에 그린 소년 Gavroche 를 닮아서 흔히 Gavroche 라고 불리죠. 다만 Côme Fabre 의 말처럼 소설이 훨씬 나중에 나왔으니, 그림이 소설 인물을 그린 건 아닙니다.

나라는 1831년 8월 이 그림을 3,000프랑에 샀지만 오래 걸어 두지 못했습니다. 그 뒤로도 파리에서 봉기와 유혈 진압이 이어지자, 바리케이드 그림은 새 왕에게 부담스러운 그림이 됐거든요. 그림은 1833년 무렵 창고에 들어갔다가 화가에게 돌아가 이모 집에 맡겨졌고, 1855년 만국박람회에서야 다시 사람들 앞에 섰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에 걸린 건 1874년부터예요.

2023년 10월부터 반년 동안 이 그림을 복원했을 때, 누렇게 바랜 니스를 얇게 걷어 내자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온통 노랗다고 알려진 여인의 옷이 사실은 회색 위에 노랑을 위에서 아래로 점점 옅게 덧칠한 것이었죠. Côme Fabre 는 Delacroix 가 이 그림에서 초록, 주황, 보라를 일부러 빼고, 회색 바탕 위에서 파랑·하양·빨강 세 가지 색이 노래하게 한 다음, 차가워진 화면을 여인의 금빛으로 데웠다고 해석합니다. 자유의 여신이 거의 신처럼 빛나 보이는 이유예요.

이 그림은 그 뒤 프랑스를 상징하는 그림이 됐습니다. 1979년부터 쓰인 100프랑 지폐에는 Delacroix 의 얼굴과 이 그림이 함께 들어갔고, 우표와 기념주화에도 여러 번 실렸죠. 2008년에는 Coldplay 가 앨범 「Viva la Vida」의 표지로 이 그림을 썼어요.

4.5. Femmes d'Alger dans leur appartement (1834)

1832년 모로코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던 Delacroix 는 프랑스가 막 점령한 Alger 에 며칠 머물렀습니다. 이때 특별히 허락을 받아, 남자는 들어갈 수 없던 무슬림 집의 여인들 방에 들어가 스케치를 할 수 있었어요. 파리에 돌아와 그 기억으로 그린 그림이 1834년 살롱에 걸린 「Femmes d'Alger dans leur appartement」(자기 방 안의 알제 여인들)입니다. appartement 는 우리가 아는 아파트가 아니라 여기서는 집 안의 방, 거처라는 뜻이에요.

어두운 방 안 양탄자 위에 화려한 옷을 입은 여인 세 명이 물담배 곁에 앉아 쉬고, 오른쪽에서 흑인 하녀가 커튼을 걷으며 돌아보는 Eugène Delacroix 의 그림

그림: Eugène Delacroix, 「Femmes d'Alger dans leur appartement」(1834), Musée du Louvre 소장

이 그림은 다음 세대 화가들의 교과서가 됐습니다. Fantin-Latour 는 이 그림을 따라 그렸고, Renoir 는 흉내 내서 그렸으며, 점을 찍어 그린 신인상주의 화가 Paul Signac 은 이 그림을 색의 대비를 과학적으로 쓴 본보기로 꼽았죠. Signac 은 1899년 책에 이렇게 썼습니다.

toutes les teintes chaudes et gaies s'équilibreront avec leurs complémentaires froides et tendres

따뜻하고 밝은 색이 모두 차갑고 부드러운 보색과 균형을 이루어

en une symphonie décorative

하나의 장식적인 교향곡이 된다.

— Paul Signac, 「D'Eugène Delacroix au néo-impressionnisme」(1899)

여인들의 옷과 양탄자, 벽 타일을 보면 빨강 옆에는 초록, 노랑 옆에는 보라가 놓여 서로를 더 환하게 비춰 줍니다. 루브르 박물관은 2021년 이 그림을 복원하면서, 누렇게 바랜 니스가 이런 색의 짜임을 가려 오랫동안 그림을 '이국적인 장면' 하나로만 보게 했다고 설명하죠. 120년 뒤 Pablo Picasso 도 이 그림에 빠져, 1954년부터 이듬해까지 같은 제목으로 15점의 변주를 그렸습니다.

5. Delacroix 의 그림을 볼 수 있는 곳

  • Musée du Louvre(파리 1구): 대표작 다섯 점과 Géricault 의 「Le Radeau de la Méduse」가 모두 Denon 관 700번 전시실(salle Mollien)에 걸려 있고, 바로 옆 Galerie d'Apollon 에서는 고개를 들면 Delacroix 의 천장화 「Apollon vainqueur du serpent Python」(뱀 Python 을 무찌른 Apollon)이 보입니다. Sully 관 942번 전시실에는 Chopin 의 초상과 Delacroix 의 자화상이 있어요.
  • Musée national Eugène-Delacroix(파리 6구, 6 rue de Furstemberg): Delacroix 가 마지막 6년을 산 집과 화실, 정원이 그대로 남은 작은 미술관입니다. 2026년 기준으로 평일에는 12시부터 17시 30분까지, 주말에는 10시부터 문을 열고 화요일에는 쉬어요. 입장료는 9유로인데, 루브르 박물관 입장권이 있으면 그날이나 다음 개관일에 무료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 Église Saint-Sulpice(파리 6구): 입구 오른쪽 첫 예배당(chapelle des Saints-Anges)에서 「La Lutte de Jacob avec l'Ange」(천사와 씨름하는 Jacob)을 비롯한 마지막 벽화를 볼 수 있습니다.
나무와 잔디가 우거진 작은 정원 너머로 큰 창이 난 흰 2층 화실 건물이 보이는 Musée national Eugène-Delacroix

사진: Rémih, Musée national Eugène-Delacroix 의 정원과 화실(2026), CC BY-SA 4.0

살롱에서 '그림의 학살'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던 화가의 그림은 이제 프랑스 공화국의 얼굴이 됐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자유의 여신을 만난 다음에는 걸어서 15분 거리의 rue de Furstemberg 로 건너가, Delacroix 가 아끼던 작은 정원에도 들러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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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길 프랑스어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프랑스어 공부자료를 목표로 2017년 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프랑스어 문법, 표현, 숙어, 속담, 사는 이야기 등을 주기적으로 포스팅하여 정리하고 있습니다. 저의 작은 프로젝트를 응원하고 싶으신 분들은 아래의 버튼을 클릭해주세요! 여러분의 후원은 지름길 프랑스어 서버 운영비에 사용되며 더 질 좋은 글 작성에 보탬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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