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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es César 에 맞서 싸운 Vercingétorix

기원전 52년 가을, 로마군에 둘러싸인 언덕 위 요새에서 한 골족 지도자가 나와 Jules César(율리우스 카이사르, 프랑스어로는 쥘 세자르) 앞에 무기를 내려놓습니다. 프랑스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그림으로 본 장면인데, 이 사람이 바로 흩어져 있던 골족(les Gaulois)을 하나로 모아 로마에 맞선 Vercingétorix(베르생제토릭스)입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그를 프랑스 역사의 첫 영웅으로 꼽지만, 정작 그의 삶은 거의 모두 적이었던 César 의 기록으로만 전해집니다. Jules César 와 갈리아 전쟁에 이어 이번에는 그가 어떻게 로마에 맞섰고 어떻게 영웅이 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Vercingétorix

1. '전사들의 위대한 왕'이라는 이름

Vercingétorix 는 골어(le gaulois)로 ver- '크다', cingeto- '전사', -rix '왕'을 이어 붙인 이름이라 '전사들의 위대한 왕'쯤 되는 뜻입니다. 이름이 지위와 너무 잘 맞아서, 지도자가 된 뒤에 얻은 칭호라고 보는 학자도 있죠. 만화 「Astérix」 주인공들의 이름이 -ix 로 끝나는 것도 Vercingétorix 를 따라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젊은 남자의 옆얼굴 옆으로 TORIX 글자가 보이는 작은 금화

사진: Vercingétorix 의 이름을 새긴 Arvernes 족의 금화(statère),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소장

그의 이름을 새긴 금화 속 얼굴은 수염 없이 짧은 곱슬머리를 한 젊은이라서, 우리가 떠올리는 긴 콧수염의 전사와는 거리가 멉니다. 다만 이 얼굴이 정말 Vercingétorix 인지, 그리스 금화를 본뜬 Apollon 인지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죠.

2. 아버지를 잃은 Arvernes 족의 젊은 귀족

Vercingétorix 는 지금의 Auvergne 지방에 살던 Arvernes(아르베르니)족 귀족 집안에서 기원전 82년 무렵 태어났습니다. César 가 기원전 52년의 그를 adulescens(서른이 안 된 젊은이)라고 적어서 이렇게 짐작하죠. 아버지 Celtillos 는 골 전체에서 으뜸가는 세력을 누렸지만, 왕이 되려 한다는 이유로 같은 부족 사람들 손에 죽었습니다.

그렇다고 Vercingétorix 가 처음부터 로마의 적은 아니었습니다. 기원전 58년 César 가 골 지방(la Gaule)에 쳐들어오며 시작된 갈리아 전쟁(la guerre des Gaules) 동안, 한때 César 밑에서 골족 기병을 이끌었을 것이라고 보는 역사학자도 있거든요.

3. 기원전 52년의 봉기와 불태운 땅

Loire 강과 Seine 강 사이에 Paris, Orléans, Bourges, Alésia, Bibracte 를, 남쪽에 Gergovie 를 표시한 지도

지도 데이터: IGN Admin Express, Natural Earth

기원전 52년 겨울, Carnutes 족이 Cenabum(지금의 Orléans)에서 로마 상인들을 죽였습니다. César 에 따르면 골족은 큰일이 생기면 들판에서 들판으로 소리쳐 소식을 전했는데, 해 뜰 무렵의 이 사건이 그날 밤이 깊기 전에 240km 가까이 떨어진 Arvernes 땅까지 알려졌다고 하죠.

Vercingétorix 는 곧 사람들을 모았지만 삼촌 Gobannitio 와 귀족들은 위험한 도박이라며 그를 Gergovie 성에서 내쫓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시골을 돌며 가난한 사람들로 군대를 꾸려 돌아왔고, 반대파를 몰아낸 뒤 왕(rex)으로 추대됐어요. Senones, Parisii(Paris 라는 이름이 이 부족에서 나왔습니다)를 비롯한 여러 부족이 곧 그의 편에 섰습니다.

Vercingétorix 는 로마군과 정면으로 맞붙지 않고, 로마군이 지나갈 길의 마을과 곡식을 미리 불태워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프랑스어로 la politique de la terre brûlée(초토화 작전)라고 하는데, Bituriges 족 땅에서만 하루에 도시 스무 곳이 넘게 불탔죠. 다만 Avaricum(지금의 Bourges)만은 골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며 Bituriges 족이 살려 달라고 빌어서 태우지 않았는데, 결국 César 에게 포위당해 함락됐습니다. 성 안의 4만 명 가운데 살아서 빠져나온 사람은 겨우 800명이었다고 해요.

4. Gergovie, César 가 진 싸움

봄이 끝나 갈 무렵 César 는 Vercingétorix 의 고향으로 쳐들어가 Gergovie(지금의 Clermont-Ferrand 근처) 언덕 위의 성을 공격했습니다. 성 아래 골족 진지 몇 곳을 빼앗은 César 는 그쯤에서 물러나라고 나팔을 불게 했지만, 사이에 큰 골짜기가 있어서 다른 군단 병사들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어요. 이긴 기세에 들뜬 병사들은 그대로 성벽 밑까지 내달렸고, 성벽 위의 골족 여인들은 옷과 은붙이를 던지며 Avaricum 에서처럼 여자와 아이까지 죽이지는 말아 달라고 빌었죠.

하지만 곧 골족 병사들이 몰려와 가파른 비탈에서 로마군을 밀어냈습니다. 마침 옆에서 Aedui 족 병사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로마 편이었지만 무기가 골족과 똑같았어요. 약속한 표시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있었는데도 로마군은 그것마저 적의 속임수로 여기고 겁에 질렸죠. 성문을 부수려다 적에 둘러싸인 백인대장(centurion) Marcus Petronius 는 '나는 너희와 함께 살아날 수 없으니 너희 목숨이라도 구하겠다'며 적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부하들이 물러날 틈을 벌고 쓰러졌습니다. 이날 César 는 병사 700명 가까이와 백인대장 46명을 잃었다고 적었죠.

이 승리 뒤 오랫동안 로마 편이던 Aedui(Éduens)족까지 돌아섰고, Bibracte 에 모인 골족 회의는 만장일치로 Vercingétorix 를 총사령관으로 뽑았습니다. 골 지방의 부족 대부분이 한 사람 아래 뭉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어요. Gergovie 고원에는 2019년 10월 이 전투를 다룬 박물관(Musée archéologique de la bataille de Gergovie)이 문을 열었습니다.

5. Alésia, 두 겹의 포위

여름에 Vercingétorix 는 Sequani 족 땅으로 향하던 로마군을 기병으로 덮쳤습니다. 결국 이 싸움에서 크게 졌지만 César 에게도 아슬아슬한 싸움이었는지, Arvernes 족은 이때 César 에게서 빼앗았다는 짧은 칼을 신전에 걸어 두었다고 해요. 150년쯤 뒤의 그리스 작가 Plutarque 에 따르면 훗날 그 칼을 본 César 는 웃기만 했고, 떼어 내자는 친구들에게 신에게 바친 물건이라며 그대로 두게 했다고 하죠.

싸움에 진 Vercingétorix 는 병사 8만 명을 이끌고 Mandubii 족의 언덕 요새 Alésia(지금의 Alise-Sainte-Reine)로 들어갔습니다. 로마군이 방어선을 다 쌓기 전 어느 밤, 그는 기병을 모두 몰래 내보내 저마다 자기 부족으로 돌아가 싸울 수 있는 사람을 다 모아 오라고 했어요. 성 안에는 30일 남짓 버틸 곡식밖에 없었거든요.

César 는 이 언덕을 빙 둘러 두 겹의 방어선을 쌓았습니다. 약 16km 의 안쪽 방어선은 성 안의 골족이 빠져나오지 못하게, 약 21km 의 바깥쪽 방어선은 도우러 올 골족 지원군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어요.

가운데 언덕 위 Alésia 요새를 파란 안쪽 방어선과 빨간 점선의 바깥 방어선이 두 겹으로 둘러싸고, 두 선 사이에 로마군 진지가, 바깥에서 골족 지원군이 다가오는 도식

도식: César 『갈리아 전기』 7권 69·72·83장을 바탕으로 그린 개념도라 실제 지형·거리와는 다릅니다

방어선 앞에는 도랑을 파고, 뾰족한 말뚝을 숨긴 구덩이와 쇠갈고리를 박은 나무토막을 촘촘히 묻었습니다.

물을 채운 긴 도랑 뒤로 나무 성벽과 망루가 늘어선 들판

사진: Carole Raddato, MuséoParc Alésia 에 다시 만든 로마군 방어선(2012), CC BY-SA 2.0

약속한 날이 지나도 지원군은 오지 않고 곡식마저 바닥나자, 성 안에서는 항복하자는 사람과 마지막으로 뛰쳐나가 싸우자는 사람이 맞섰습니다. 이때 Arvernes 족 귀족 Critognatus 는 조상들이 Cimbres 족과 Teutons 족에게 밀려 성에 갇혔을 때 그랬듯, 나이 들어 싸울 수 없는 사람들의 몸을 먹으며 버티자고까지 했어요. César 도 이 연설만은 끔찍하기 짝이 없어서 그냥 넘길 수 없다며 길게 옮겨 적었죠.

회의는 그 방법을 맨 마지막으로 미루고, 먼저 싸울 수 없는 사람들을 성 밖으로 내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요새의 주인이던 Mandubii 족이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성을 나가야 했는데, 노예로라도 받아 달라며 우는 이들을 César 는 끝내 들여보내지 않았습니다.

6. Alésia 의 마지막 싸움

그사이 골 전체에서 모은 지원군이 Alésia 에 닿았습니다. César 의 기록에 따르면 기병 8천 명과 보병 25만 명 가까운 대군이었고, 지휘관 넷 가운데에는 Vercingétorix 의 사촌 Vercassivellaunus 도 있었어요.

지원군은 바깥에서, Vercingétorix 는 안에서 함께 공격했지만 두 번 모두 방어선 앞에서 밀려났습니다. 세 번째에 골족은 약한 곳을 노렸어요. 북쪽 언덕이 너무 커서 방어선 안에 다 넣지 못한 로마군이 비탈에 어정쩡하게 세운 진지였죠.

골족은 이름난 부족들에서 6만 명을 골라 Vercassivellaunus 에게 맡겼고, 그는 밤새 걸어 산 뒤에 숨었다가 한낮에 이 진지를 덮쳤습니다. 성 안의 Vercingétorix 도 이를 보고 준비해 둔 장비를 들고 뛰쳐나와서, 로마군은 안팎에서 동시에 싸워야 했어요.

방어선이 무너지기 직전 César 가 직접 달려오자, 골족은 그가 싸움터에서 표시로 입던 옷 색깔을 보고 그가 왔다는 걸 알아봤다고 합니다. 바로 그때 바깥 방어선을 돌아 나간 로마 기병이 골족의 등 뒤에 나타났고, 골족은 무너졌어요. Vercassivellaunus 는 도망치다 산 채로 붙잡혔고, 골족 군기 74개가 César 앞에 놓였습니다. 이 모습을 성 안에서 지켜본 골족도 결국 돌격을 멈추고 물러났죠.

7. 무기를 던진 항복 장면의 진실

마지막 싸움에 진 다음 날, Vercingétorix 는 자신이 아니라 모두의 자유를 위해 싸웠다며 자기를 죽이든 산 채로 넘기든 마음대로 하라고 스스로를 내놓았습니다. César 는 그 장면을 이렇게 짧게 적었어요.

Vercingetorix deditur, arma proiciuntur.

Vercingétorix 가 넘겨지고, 무기들이 내던져졌다.

— Jules César, 『갈리아 전기(Commentarii de Bello Gallico)』 7권 89장

말을 탄 Vercingétorix 가 César 앞을 한 바퀴 돈 뒤 무기를 발밑에 던졌다는 이야기는 César 의 기록에는 없고 Plutarque 의 글에서 나왔습니다. 1899년 Lionel Royer 가 이 장면을 그리면서 누구나 아는 모습이 됐죠.

흰 말을 탄 긴 머리의 골족 지도자가 붉은 망토를 두르고 앉은 César 를 내려다보고, 땅바닥에 칼과 투구가 흩어져 있는 그림

그림: Lionel Royer, 「Vercingétorix jette ses armes aux pieds de Jules César」(1899), Musée Crozatier(Le Puy-en-Velay) 소장

Vercingétorix 는 로마로 끌려가 6년 동안 갇혀 지내다가 기원전 46년 César 의 개선식(le triomphe)에 끌려 나왔고, 로마 역사가 Dion Cassius 는 그 뒤 그가 처형됐다고 적었습니다.

알아두면 좋은 단어

  • la guerre des Gaules : 갈리아 전쟁. César 가 남긴 『갈리아 전기』의 프랑스어 제목이기도 합니다
  • le siège : 포위. le siège d'Alésia 는 Alésia 포위전입니다
  • se rendre / la reddition : 항복하다 / 항복
  • la politique de la terre brûlée : 초토화 작전. 직역하면 '불탄 땅 정책'입니다
  • l'armée de secours : 지원군

8. 19세기에 다시 태어난 영웅

오랫동안 잊혔던 Vercingétorix 를 영웅으로 다시 세운 것은 19세기였습니다. 1828년부터 나오기 시작한 Amédée Thierry 의 『Histoire des Gaulois』가 그를 낭만적인 영웅으로 그려 내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Napoléon III 는 1860년대에 Alise-Sainte-Reine 언덕을 발굴하게 한 뒤 1865년 그곳에 조각가 Aimé Millet 가 만든 높이 6.6m 의 동상을 세웠고, 7m 높이의 받침대에 이런 글을 새겼죠.

La Gaule unie, formant une seule nation, animée d'un même esprit, peut défier l'univers.

하나로 뭉쳐 한 민족을 이루고 한마음으로 움직이는 골은 온 세상에 맞설 수 있다.

— Alise-Sainte-Reine 의 Vercingétorix 동상 받침대(1865)
높은 원통형 받침대 위에 긴 머리와 콧수염의 골족 전사가 칼자루에 손을 얹고 선 청동빛 동상

사진: Myrabella, Alise-Sainte-Reine 의 Vercingétorix 동상(Aimé Millet, 1865), CC BY-SA 4.0

Paris 와 Dijon 을 잇는 기찻길에서도 보이는 이 동상은 Napoléon III 가 자기 돈으로 값을 치른 것이라, 얼굴도 그를 닮게 만들었다는 말이 있어요. 칼은 청동기 시대, 갑옷은 철기 시대 유물을 본떠서 서로 시대가 맞지 않고, 바람에 날리는 긴 머리는 골족보다 Franc 족의 Mérovingiens 왕들을 떠올리게 하죠.

재밌게도 Napoléon III 는 자신이 쓴 『Histoire de Jules César』(1865~1866)에서는 Vercingétorix 의 패배를 슬퍼할 수 없다고 썼습니다. 제도와 풍습, 언어까지 로마의 정복에서 왔으니 프랑스 사람은 진 쪽보다 이긴 쪽의 자손에 가깝다는 것이었죠.

1870년 프로이센에 진 뒤 제3공화국의 학교는 Vercingétorix 를 침략자에 맞선 첫 영웅으로 가르쳤고, 'nos ancêtres les Gaulois(우리 조상 골족)'라는 말도 이 무렵 교과서를 따라 퍼졌습니다. 역사학자 Christian Goudineau 에 따르면 이때 사람들은 1870년 전쟁을 César 와 Vercingétorix 의 싸움에 빗대어, 프로이센 사람을 로마인에, Bismarck 를 César 에, 끝까지 싸우자고 외친 정치가 Léon Gambetta 를 Vercingétorix 에 겹쳐 봤어요. Vercingétorix 도 Gambetta 처럼 졌지만 프랑스는 큰 나라가 됐으니 이제 복수(la Revanche)를 준비하자는 교훈이었죠.

1903년에는 자유의 여신상을 만든 Auguste Bartholdi 의 기마상이 Clermont-Ferrand 의 Place de Jaude 에 섰어요.

날개 달린 투구를 쓴 전사가 칼을 높이 들고, 쓰러진 병사 위로 뛰어오르는 말에 올라탄 청동 기마상

사진: Marie-Lan Nguyen, Clermont-Ferrand 의 Vercingétorix 기마상(Bartholdi, 1903), CC BY 2.5

이 기마상이 쓴 날개 달린 투구는 역사적 근거가 없는 상상이에요. 날개는 오히려 로마 개선식의 전리품 장식에서 온 것인데, 전쟁 뒤 담배 Gauloises 갑에 그려지면서 골족 하면 떠오르는 모습이 됐죠. 긴 머리와 늘어진 콧수염의 얼굴도 대부분 이 무렵의 화가와 조각가들이 만들어 낸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Vercingétorix 를 프랑스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Goudineau 에 따르면 로마 사람들은 대서양에서 지금의 Budapest 까지 이어진 켈트 세계 전체를 Gallia 라고 불렀는데, César 가 Rhin 강을 경계로 그 서쪽만 떼어 골(la Gaule)이라고 정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골부터 César 가 만들어 낸 것이고, 그 안에서도 부족들은 저마다 자기 땅을 다스렸죠. Vercingétorix 역시 프랑스라는 나라가 아니라 Arvernes 족과 그 편에 선 부족들을 이끌고 싸운 사람이었습니다.

고고학자 Jean-Paul Demoule 은 지금의 프랑스 땅에 살아온 사람들의 역사가 끊임없이 섞여 온 역사라며 '골족 조상'을 내세우는 것부터 말이 안 된다고 했고, Goudineau 도 역사학에서 '조상'이라는 개념은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다만 Goudineau 는 'nos ancêtres les Gaulois'를 내세운 19세기 역사가들이 프랑스라는 나라를 만드는 데 큰 몫을 했다고 인정하며 '프랑스라는 조국은 엄연히 있다'고 덧붙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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